오늘은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공식적인 공생애를 시작하시던 날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마태복음 3장 16절과 17절은 그 찬란한 출발의 순간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하늘로부터 울려 퍼진 “내 기뻐하는 자”라는 고백은, 수백 년 전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예언하셨던 메시아의 정체성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오늘 본문인 이사야 42장 1절 역시 선포합니다.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 그분께서 택하여 세우신 메시아의 공통된 정체성은 바로 ‘성령의 임재’, 즉 하나님의 영에 속한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성령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이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을 바람, 불, 혹은 물로 비유하곤 합니다. 인간의 제한적인 오감으로는 온전히 포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에 속한 사람은 그 영이 내 안에서 세밀하게 일하고 계심을 분명히 느낍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반드시 삶의 근본적인 변화를 맞이합니다. 그 변화는 때로 가랑비에 옷 젖듯 서서히 찾아오기도 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강력하고 급작스러운 사건으로 찾아오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의 인생이 그러했습니다. 그는 본래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특심했던 철저한 종교인이었으나, 영적인 무지함 때문에 예수 믿는 자들을 옥에 가두고 죽이는 편협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전히 살기등등하여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 위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면하게 됩니다. 강렬한 하늘의 빛 앞에 말에서 떨어져 땅에 엎드러진 그에게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그 후 사흘 동안 시력을 잃고 철저한 어둠 속에서 자신의 죄를 처절하게 자각한 그는, 이방인을 위한 복음의 사도로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이처럼 성령의 역사는 인간의 완고한 고집을 꺾고 새 사람을 만드시는 강력한 신적 개입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감동과 180도 다른 삶의 변화는 기독교 선교 역사 속에서 수없이 반복되어 왔습니다. 전 세계 수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렸던 고전 영화 <더 미션(The Mission)>은 이를 시각적으로 완벽하게 증명합니다.
영화는 18세기 남미,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국경 지대의 가혹한 선교 현장에서 시작됩니다. 처음에 파견된 예수회 선교사는 원주민들에 의해 십자가에 묶인 채 거대한 폭포 아래로 던져져 허무하게 순교합니다. 백인들이 자신들을 붙잡아 노예로 팔아넘기던 악행에 대한 원주민들의 정당한 분노이자 적대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브리엘 선교사는 모두의 만류를 뒤로한 채 그 위험천만한 곳으로 다시 걸어 들어갑니다. 그는 오보에라는 악기를 들고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하며 원주민들의 마음을 열었고, 결국 복음으로 깊은 신앙의 공동체를 일구어 냅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인물은 바로 악명 높은 노예 사냥꾼이었던 ‘로드리고’입니다. 그는 돈에 눈이 멀어 원주민을 짐승처럼 잡아가 가정을 파괴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치정 얽힌 투쟁 끝에 친동생을 죽이게 되는 비극을 겪고, 극심한 죄책감과 절망 속에서 스스로 굶어 죽기를 선택합니다.
스스로 삶을 포기한 그 참혹한 자리에 가브리엘 선교사가 찾아옵니다. 그리고 로드리고는 자신이 그토록 괴롭혔던 원주민 공동체로 기어가 눈물의 용서를 구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한 여정의 시작은 언제나 이처럼 ‘자신의 철저한 죄에 대한 자각’에서 출발합니다.
가브리엘 선교사가 묵묵히 져 준 무거운 참회의 짐(그가 노예 사냥 때 쓰던 무거운 철갑옷 더미), 그리고 원주민이 내민 용서의 칼날이 그의 목을 겨누다 마침내 눈물의 포옹과 줄을 끊어주는 자비로 바뀔 때, 로드리고는 완벽한 ‘영에 속한 사람’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후 제국주의 군대의 전쟁이 터졌을 때, 그들은 무력한 원주민들을 버리지 않고, 그들의 생명과 인권을 지키기 위해 마지막 목숨까지 바치며 그리스도의 성육신적 사랑을 실천하며 순교합니다.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원주민을 위해, 이미 가망 없는 싸움인 줄 알면서도 목숨을 내놓고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 싸운 선교사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인 이사야 42장은 우리가 닮아가야 할 참된 메시아, 그리고 영에 속한 사람의 성품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습니다.
- 자기 목소리를 낮추는 겸손입니다: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 사랑입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 불공정을 바로 세우는 정의입니다: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 결코 좌절하지 않는 소망입니다: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 흑암에 앉은 자를 풀어주는 치유입니다: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 그리스도의 영, 즉 생명을 주는 일입니다: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대 사회는 물질적으로는 단연 최고의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영적으로는 그 어느 때보다 혼탁하고 어두운 시대입니다. 온갖 편리함과 흥미로운 오락거리가 가득하여,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을 깊이 생각하고 영적으로 호흡할 수 있는 시간은 완전히 상실해 버렸습니다. 인간의 이성과 과학, 그리고 자본이 만들어 낸 현대판 바벨탑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으나, 그 이면에는 늘 형언할 수 없는 불안과 고독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과거 반기문 UN 사무총장께서 현대 문명의 모순을 날카롭게 지적했던 고백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건물은 높아졌지만 인격은 더 작아졌고, 고속도로는 넓어졌지만 시야는 더 좁아졌다. 소비는 많아졌지만 기쁨은 더 줄어들었고, 집은 커졌지만 가족은 더 적어졌다. 생활은 편리해졌지만 시간은 더 부족하고, 가진 것은 몇 배가 되었지만 소중한 가치는 더 줄어들었다. 돈을 버는 법은 배웠지만 나누는 법을 잊어버렸고, 평균수명은 늘어났지만 시간 속에 삶의 의미를 넣는 법은 상실했다.”
저는 인간의 과학 문명 자체가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 역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잃어버린 교만의 문명은 결국 하나님을 거스르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주님은 이 영적 탈진의 시대 속에서 우리에게 참된 신앙 공동체의 대안을 제시하십니다. 자기 목소리를 낮추는 겸손, 상한 갈대를 결코 꺾지 않는 긍휼의 사랑, 불공정을 바로 세우는 정의, 그리고 어둠에 갇힌 자를 풀어주는 치유입니다.
현재 우리 교회가 온 마음을 쏟고 있는 대학 선교와 이민 사회의 사역 역시 이 관점에서 전면적으로 재해석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다음 세대인 청년들과 소통하고 그들을 전도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고집스러운 생각과 가치관을 먼저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들의 세계로 직접 들어가 그들의 문화와 다른 생각을 인정하고 포용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내려오신 참된 성육신(Incarnation)의 정신입니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이 땅의 한인 청년들과 학생들이 영적 갈급함 속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내 생각만 옳다고 주장하며 그들이 교회로 찾아오기만을 기다리는 고여 있는 신앙을 과감히 타파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그들의 아픔과 현실 속으로 먼저 걸어 들어갑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세상의 세속적 가치에 당당히 대항하며, 상처받은 이들을 품는 진실한 사랑의 공동체를 함께 만들어 갑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삶 속에서 실천할 때, 이 땅은 비로소 치유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에 깊이 속한 사람이 되어, 공의롭고 자비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가운데 아름답게 세워가는 복된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