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말씀: 마태복음 16:13-20
도입부
“당신의 이름 뒤에는 어떤 삶이 담겨 있습니까?” 오늘 예수님은 인생의 가장 결정적인 질문을 던지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에 대한 베드로의 고백은 오늘날 흔들리는 우리 신앙과 교회를 지탱하는 거대한 반석이 되었습니다. 입술의 고백을 넘어 삶의 증명으로 나아가는 참된 제자의 길을 소개합니다.
본문
이름, 그 존재의 무게
모든 사람에게는 이름이 있습니다.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닙니다. 만약 오랜 친구에게 전화가 와서 자신의 이름을 말한다면, 우리는 그 이름과 동시에 그의 성품, 기억, 삶의 궤적을 동시에 떠올립니다. 이름은 곧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담는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은, 그리고 당신은 ‘예수’라는 이름을 들을 때 어떤 존재를 떠올리십니까?
가장 변두리에서 던져진 질문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유대 땅 최북단 변두리인 ‘빌립보 가이사랴’로 가셨습니다. 세상의 권력과 우상 정치가 가득한 그곳에서 예수님은 묻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은 세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같은 위대한 선지자들의 이름을 댑니다. 세상의 평가는 거기까지였습니다.
예수님의 시선은 이제 제자들을 향합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때 성급하지만 영적인 통찰력을 가졌던 베드로가 주저 없이 외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인시니이다.” (마 16:16)
이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를 ‘요나의 아들 시몬’이라 부르시며 크게 칭찬하십니다. (참고로 요한복음의 ‘요한의 아들’과 마태복음의 ‘요나의 아들’은 아람어 이름을 헬라어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생긴 동일 이름의 축약형태입니다. 마치 William을 Bill로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의 진짜 반석은 누구인가?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고, “천국 열쇠”를 약속하셨습니다. 역사적으로 카톨릭은 이를 베드로라는 ‘인물’과 교황의 권위로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개신교의 해답은 다릅니다. 마태복음 18장 18절에서 예수님은 동일한 매고 푸는 권세를 베드로 개인이 아닌 ‘너희(복수형 HUMIN)’ 즉, 제자 공동체 모두에게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우리와 똑같이 나약한 인간이었습니다. 이 고백 직후 예수님께 “사탄아 물러가라”는 책망을 들었고,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인간 베드로는 결코 교회의 완벽한 기초가 될 수 없습니다. 베드로 자신도 베드로전서 2장 6절에서 예수님이 진정한 ‘모퉁이돌’이라고 고백했으며, 사도 바울 역시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서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라고 선언했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반석은 인간 베드로가 아니라, 베드로가 드렸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인간은 변하고 넘어지지만, 이 고백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은 영원히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핵심 예화와 결단
고백은 입술이 아닌 삶의 열매입니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그 고백이 진짜인지는 삶의 위기 속에서 증명됩니다. 우루과이의 한 시골 성당 벽에 적힌 글은 우리의 안일한 고백을 뒤흔듭니다.
세상 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하늘에 계신”**이라 하지 마라. 너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우리”**라고 하지 마라. 아들딸로 살지 않으면서 **”아버지”**라고 하지 마라. 내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하지 마라. 죽을 때까지 먹을 양식을 쌓아두려 하면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 하지 마라. 누군가에게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 하지 마라. 아멘이라고 하지 마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치지 않으면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고백은 단어의 나열이 아닙니다. 그분의 삶을 닮아가기 위해 오늘도 내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따르는 ‘삶의 발걸음’입니다. 입술을 넘어 당신의 온 삶으로 이 고백을 증명해 내는 신실한 제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