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4:13-21] 들판의 잔치: 화려한 왕궁과 황량한 광야의 대비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겠지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오병이어의 사건은 성경에 나오는 기적 중 가장 놀랍고 위대한 일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남자만 5,000명을 먹이신 사건입니다.

당시 숫자에 계수된 ‘남자’는 20세 이상, 즉 전쟁에 나가 싸우거나 노동력이 있는 성인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여성과 아이들까지 모두 포함한다면 족히 15,000명에서 20,000명에 이르는 대인원이었을 것입니다. 이는 1세기 당시 웬만한 도시 전체 인구를 능가하는 엄청난 숫자입니다.

표적을 구하는 마음, 의미를 찾는 마음

우리는 종종 이 말씀을 접할 때 ‘적은 양으로 수만 명을 먹인 물질적인 기적’ 그 자체에만 시선을 빼앗기곤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22절에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다”라고 말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초자연적인 기적을 통해 하나님의 현존을 확인하려는 성향이 강했고, 헬라인들은 이성적인 이해와 논리를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한국 교회의 정서는 다분히 체험과 표적을 구하는 경향과 맞닿아 있습니다. 반면, 이성적이고 귀납적인 성경 연구 전통이 깊은 서구 신학 배경의 그리스도인들은 기적의 현상 자체보다 그 기적이 내포하고 있는 신학적 ‘의미’와 ‘본질’에 더 집중하는 성향을 보입니다. 오늘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이 오병이어의 기적 속에 감추어진 진짜 의미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세기의 결핍과 현대 사회의 구조적 모순

1세기 유대 사회는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와 확연히 달랐습니다. 특히 ‘먹고 사는 문제’는 생존과 직결된 매일의 공포였습니다. 당시 유대 땅은 철저한 피라미드형 계급 사회였습니다. 최상층의 소수 엘리트 지배 계급은 풍부한 식량을 독점하며 음식 걱정 없이 호화로운 삶을 누렸습니다. 반면, 절대다수의 서민들은 늘 끼니를 걱정해야 했습니다. 지배 계층이 식량의 유통과 통제권을 쥐고 힘의 논리로 서민들을 억압했던 구조였습니다.

놀랍게도 이러한 구조적 모순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현대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전 세계 식량 생산량은 인류 전체를 먹이고도 남지만, 세계 식량 가격은 철저히 시장 논리와 소수 자본의 이윤 추구에 의해 좌우됩니다. 생명이 아닌 이윤이 중심이 되는 구조 속에서, 최근 UN 식량농업기구(FAO)의 보고에 따르면 전 세계 약 7억 3천만 명이 넘는 인구가 여전히 만성적인 기아와 영양 부족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1세기 유대 서민들 역시 극심한 영양 부족으로 인해 지배 계층에 비해 수많은 질병을 안고 살았습니다. 의료 혜택은커녕 하루 한 끼가 간절했던 그들의 삶은 그 자체가 고통이었습니다.

광야(사막)에서 겹쳐진 두 개의 고독

본문 13절은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외딴 곳으로 떠나셨다고 기록합니다. 주님이 홀로 빈 들로 가신 이유는 세례 요한이 헤롯 왕에 의해 잔인하게 참수당했다는 소식을 들으셨기 때문입니다. 원어에서 이 ‘외딴곳’ 혹은 ‘빈 들’은 ‘사막(Eremos)’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실제 모래사막이라기보다는, 아무도 없는 적막하고 고독한 공간을 뜻합니다.

그런데 15절에 굶주린 백성들이 모여든 곳 역시 똑같은 단어인 ‘사막’입니다. 권력자의 칼날을 피해 고독하게 빈 들로 향하신 예수님의 마음과, 삶의 배고픔과 질병에 지쳐 주님을 찾아온 백성들의 황량한 마음이 그 ‘사막’이라는 공간에서 서글프게 겹쳐진 것입니다.

마가복음 6장 34절은 이 백성들의 모습을 보며 예수님께서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셨다”고 증언합니다. 목자가 없는 양은 독초를 먹거나, 들짐승에게 찢기거나, 가시덤불에 걸려 목숨을 잃기 십상입니다. 백성들에게는 왕궁의 헤롯 왕이 있었고, 종교적 지도자인 제사장들이 있었지만, 그 누구도 백성들의 굶주림과 아픔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결국 영적·육적 사막에 놓인 백성들은 자신들의 목자가 되어줄 참된 리더를 찾아 갈릴리 바다를 건너 걸어서, 혹은 배를 타고 예수님보다 먼저 와서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은 그 지치고 병든 몸들을 보시며 깊은 긍휼(Compassion)을 느끼셨고, 그들의 아픔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두 개의 잔치: 헤롯의 왕궁 vs 예수의 들판 잔치. 

마태복음은 의도적으로 14장 전반부의 ‘헤롯 왕의 잔치’와 후반부의 ‘예수의 들판 잔치’를 강렬하게 대비시킵니다.

  • 헤롯의 잔치: 화려한 왕궁에서 열렸습니다. 풍부한 산해진미, 궁중 음악가들의 현란한 연주, 화려한 의복을 입은 여인들의 춤이 있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엘리트들이 모였습니다. 그러나 그 잔치의 실상은 어떠했습니까? 권력가들의 모략과 술수, 성적 타락, 거만과 허세가 가득했습니다. 결국 그 화려한 잔치의 끝은 하나님의 선지자 세례 요한을 목 베어 쟁반에 담아오는 잔인한 살인으로 끝이 났습니다. 세상의 중심이라 불리는 왕궁의 잔치는 결국 ‘죽음의 잔치’였습니다.
  • 예수의 잔치: 갈릴리 바닷가의 거칠고 황량한 들판에서 열렸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푸르고 잘 가꾸어진 정원이 아닙니다. 메마르고 거친 흙먼지가 날리는 광야였습니다. 준비된 음색 역시 초라하기 그지없는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가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그 거친 들판에는 왕궁에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병든 자의 치유가 있었고, 영혼을 어루만지는 위로가 있었으며, 조건 없는 환대와 나눔이 있었습니다. 신분과 조건에 상관없이 함께 무리 지어 앉아 음식을 나누는 평등한 대화가 있었습니다. 그 척박한 들판은 결국 모두가 배불리 먹고 기쁨으로 충만해진 ‘생명의 잔치’가 되었습니다.

인생의 참다운 가치와 영원한 생명은 화려한 세상의 왕궁(헤롯의 잔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록 초라해 보일지라도 주님의 은혜가 머무는 광야(예수의 잔치)에 있음을 성경은 웅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날이 저물자 제자들은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합니다. 무리를 마을로 보내 각자 알아서 음식을 사 먹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청천벽력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16절)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돈이 없다는 것을 모르셨을까요? 아닙니다. 주님은 이 질문을 통해 ‘하나님의 공동체(교회)가 세상과 어떻게 달라야 하는가’를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왕궁의 권력자들은 넘쳐나는 식량을 자신들의 사치스러운 잔치를 위해 낭비하며 굶주린 백성들을 외면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공동체는 그래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가진 적은 것일지라도, 그것을 나누어 굶주린 이웃을 돌보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방식이다”라는 선언입니다.

우리에게는 오병이어의 초자연적인 기적을 일으킬 능력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심어 주신 ‘나눔과 긍휼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갈 수는 있습니다. 이 정신을 이어받아 그리스도인들은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소외된 자들을 구제하고 굶주린 이들을 먹이는 선한 단체들을 세워 왔습니다. 캐나다의 ‘House of Friendship’을 비롯한 수많은 기독교 NGO 단체들이 매년 수십만 파운드의 식량을 조건 없이 나누는 이유가 바로 이 주님의 명령 때문입니다.

한국의 작은 예수, 서서평 선교사의 삶

이 명령을 온몸으로 살아낸 위대한 여인이 있습니다. 한국 이름 서서평, 미국 이름 엘리자베스 셰핑(Elizabeth Johanna Shepping, 1880~1934) 선교사입니다. 독일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건너가 간호 전문학교와 신학교를 졸업한 그녀는 1912년, 가장 낮고 어두웠던 조선의 땅에 간호 선교사로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광주제중병원에서 당시 사회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어 버림받았던 한센병(나병) 환자들을 지극정성으로 돌보았습니다. 결혼을 하지 않았음에도 한센인들의 아이들 13명을 자신의 양아들, 양딸로 입양해 키웠고, 가난한 여성들을 위해 한국 최초의 여성 신학교인 이일성경학교(현 한일장신대)를 세웠습니다.

그녀의 삶은 철저한 비움이었습니다. 항상 조선의 가난한 이들처럼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고 짚신을 신었습니다. 22년 동안 오직 한 번의 휴가만 다녀올 정도로 자신을 돌보지 않고 사역했던 서서평 선교사는 1934년, 결국 만성 영양실조와 풍토병으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미국 선교부에서 나오는 생활비는 혼자 풍족하게 살기에 충분한 액수였지만, 모든 돈을 가난한 이들을 먹이고 입히는 데 썼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남겨진 유품은 누군가에게 반쪽을 잘라 주고 남은 담요 반장, 노동자의 일주일 품삯에 불과했던 동전 몇 개, 그리고 강냉이 가루 두 그릇이 전부였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시신마저 의학 연구용으로 기증했습니다.

그녀의 장례식 날, 광주천의 수많은 부랑인과 한센병 환자, 고아들이 “어머니, 어머니”를 부르짖으며 통곡했습니다. 그 통곡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동네가 떠나갈 듯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녀의 삶은 비록 화려한 왕궁의 삶은 아니었지만, 거친 조선 땅에서 주님의 풍성한 들판 잔치를 베푸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였습니다.

에필로그: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으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세워 가야 할 교회와 가정 공동체는 과연 어떤 모습이어야 합니까? 세상의 성공과 화려함만을 좇는 헤롯의 잔치입니까, 아니면 낮고 소외된 자들을 품는 예수님의 잔치입니까?

오늘날 세상에는 목자 없는 양처럼 영적·육적 사막을 떠도는 영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매일의 생존을 걱정하고, 상처받고, 영적인 안식을 얻지 못해 갈급해하는 이들을 향해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오늘 본문은 잔치가 끝난 후 먹고 남은 조각을 거두니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찼다고 증언합니다. 이는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작은 것을 나눌 때, 부족함이 아니라 모두를 배불리고도 남음이 있는 ‘하나님 나라의 영적 풍성함’이 임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우리 모두 세상의 거짓된 화려함을 내려놓고, 영원한 안식과 위로가 있는 주님의 들판 잔치로 나아갑시다. 그리고 나아가 길 잃은 영혼들을 이 풍성한 은혜의 자리로 초대하는 참된 교회의 능력을 회복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