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자유와 실천으로 걸어가는 좁은 문

본문: 누가복음 13:22-30

1. 성곽의 숨겨진 작은 문, 좁은 문

오래전에 만들어진 고대의 성곽들을 보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크고 화려한 성문이 전면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러나 성곽 주위를 자세히 살펴보면 일반인들이 잘 쓰지 않는 작은 문, 즉 ‘좁은 문’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 문은 평소에는 왕래가 거의 없으며, 주로 첩자를 은밀히 보내거나 성이 포위당하는 위급한 상황에서 도망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특수한 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장면 역시, 아마도 예루살렘 성곽의 이러한 구조를 직접 바라보시거나 염두에 두시면서 무리에게 천국 복음을 가르치셨을 것입니다.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작고 협착한 그 문을 생각하시면서 말입니다.

2.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이 남긴 영적 오해

‘좁은 문’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 문학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프랑스의 거장 앙드레 지드가 쓴 동명의 소설 《좁은 문》을 자연스럽게 떠올리실 것입니다. 저 역시 학창 시절 고전이 주는 묵직한 울림을 좋아해 이 책을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소설 속 주인공인 알리사는 신앙적 순결을 추구하기 위해, 사촌 동생 제롬과의 지상에서의 인간적인 사랑과 행복을 거부합니다. 그녀는 더 큰 영적 행복을 추구한다는 명목으로 스스로 고난의 좁은 문을 선택하지만, 결국 외롭게 죽음을 맞이하는 비극으로 끝이 납니다.

우리는 1902년에 발표된 이 문학 작품 속에서 당시 기독교 신앙이 가졌던 심각한 오류를 날카롭게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당시 프랑스 청교도들의 신앙은 철저히 말씀 중심이었고 거룩한 삶을 요구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인간의 정신과 이성을 상위의 고상한 가치로 두고,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이나 본능적인 욕구를 하위의 가치로 분류하여 무조건 죄악시하고 억누르는 이분법적 사고였습니다.

3. 하나님이 주신 온전한 성품: 지·정·의

여러분, 묻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한다고 해서 한 사람을 사랑하는 감정이 죄가 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어머니가 문학을 사랑하고 예술을 즐기는 것이 신앙에 방해가 됩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은 동시다발적으로 역사하며 다양한 성격을 가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삶의 최고 가치로 사랑하면서 동시에 자녀를 사랑하고, 연인을 사랑하며, 친구를 아낄 수 있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향해 측은지심을 품고, 기르는 가축을 돌보는 것도 모두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다양한 표현입니다. 앙드레 지드는 소설을 통해 “인간의 행복을 억압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부과한 엄격한 도덕과 윤리이다”라고 고발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 영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지성, 감정, 의지, 그리고 육체적인 기쁨까지 모두 선물로 주셨습니다. 여행을 떠나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누리는 즐거움 또한 하나님이 인간에게 허락하신 삶의 크나큰 축복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이 예수님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을 너무나 편협하게 해석하여, 스스로 종교적인 억압 속에 갇혀 살아가곤 합니다. 일반 소설을 읽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거나, 대중음악을 들으면 마음이 불편해지는 편협함은 세상의 다양한 문화 및 가치관과 소통할 수 없게 만듭니다. 결국 자신의 좁은 생각에 갇혀 타인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율법주의자가 될 뿐입니다.

저 역시 젊은 시절, 합창단을 창단하면서 오직 신앙적인 노래만 불러야 한다는 편협함에 갇혀 있던 부끄러운 과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아름다운 인간의 감정을 노래하고 춤추는 것은 결코 죄가 될 수 없습니다.

4. 진짜 좁은 문: 구체적인 ‘삶의 실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좁은 문’은 이처럼 인간의 본성을 억누르는 금욕주의적 편협함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철저히 성도의 구체적인 ‘삶의 내용’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떤 이가 예수님께 와서 “구원받을 자가 적습니까?”라고 질문하자,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명령하십니다. 여기서 ‘좁은 문’의 원어적 의미는 몸을 움츠려 겨우 비집고 들어가야 할 만큼 좁고 협착한 문을 뜻합니다. 누구나 쉽게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아니며, 들어오기를 구하여도 들어가지 못하는 자가 많다고 경고하십니다. 심지어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아버린 후에는, 밖에서 아무리 문을 두드리며 열어달라고 호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문밖에 쫓겨나 울부짖는 이들이 주님과 깊은 종교적 친밀함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님은 우리의 길거리에서 직접 가르치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설교를 들었고, 예배에 참석했으며, 종교적인 문화권 안에서 주님을 잘 안다고 자부했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대답은 엄중합니다.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5. 구원의 조건과 하나님의 절대 주권

참된 구원의 증거는 종교적인 지식이나 표면적인 경력이 아닙니다. 진정한 구원은 주님의 말씀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악을 행하지 않으며, 삶의 현장에서 그 가르침을 실천해내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진짜 좁은 문은 나의 본능을 죄악시하는 금욕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온전한 자유를 가지고 남들이 가지 않는 희생의 길, 사랑의 길, 말씀대로 살아내는 좁은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것입니다. 만약 율법주의와 형식주의가 맞았다면, 예수님께서 왜 당대의 죄인들과 세리들의 친구가 되어 그들과 함께 식탁을 나누셨겠습니까? 주님은 우리가 세상 속으로 들어가 세상을 깊이 이해하고 그들에게 복음의 사랑을 행동으로 증명하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구원의 주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습니다. 예레미야서 말씀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모태에 짓기 전부터 우리를 아시고 구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인간의 시간적 한계와 이기적인 판단을 완전히 초월합니다.

지금은 방탕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속에 있다면 수십 년 후에라도 변화되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지금은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것 같아도, 중심에 예수를 영접하지 않고 행악을 일삼는다면 문밖에 남겨지는 당사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다”고 단언하셨습니다.

칼뱅의 예정론은 인간이 타인을 정죄하고 심판하기 위한 논리가 아닙니다. 이는 오직 시공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찬양하는 교리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믿은 우리는 결코 영적으로 교만해질 수 없으며,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날마다 넘어질까 두려워하며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포도원에 이른 아침에 온 자나, 오후 늦게 온 자나 동일한 은혜의 데나리온을 주시는 주님의 자비를 보며 억울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먼저 믿은 우리는 더 오랜 시간 하나님 나라의 영광스러운 동역자로 참여하는 복을 누렸기 때문입니다.

핵심 예화와 결단

과거 합창단을 이끌며 ‘오직 성가만 가르치고 부르겠다’고 고집했던 저의 편협함은 도리어 하나님의 풍성한 세계를 가로막는 벽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풍부한 감정과 문화적 유산들을 죄악시하는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진짜 좁은 길은 골방에 숨어 세상을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주신 자유함을 가지고 세상 한복판으로 들어가,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삶의 행동으로 묵묵히 실천해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함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삶의 실천을 통해 기꺼이 좁은 문으로 걸어 들어가는 신실한 주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